‘디지털 노마드’라는 환상

노마드는 유목민을 뜻하는 라틴어다. 원래 유목민이란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이동생활을 하는 민족을 의미했다. 건조한 사막 지역에선 가축에게 먹일 풀이 있는 곳이 드물었고, 사람들이 살기엔 척박한 곳이 많았다. 그들은 사람이 살기 좋은 장소를 찾아 계속해서 이주해야만 했다.

이런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를 현대의 철학적 개념으로 주요하게 인식했던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다. 들뢰즈는 그의 저서『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에서 ‘노마디즘(Nomad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노마드라는 용어의 철학적 접근을 가능케 했고, 이 단어에 디지털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현재 우리가 말하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이 디지털 노마드라는 용어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프랑스의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다. 그는 책『21세기 사전(Dictionnaire du XXIe siècle)』을 통해 “사람들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디지털 시스템 하에서 ‘정착’을 거부하고 ‘유목’으로 변모해 가며, 삶의 질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부유한 계급은 생산적인 곳을 선점하기 위해 유목의 길을 나설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이동해야 하므로 결국은 누구나 유목민이 된다”며 디지털 노마드를 언급했다.

그리고 2017년 현재 디지털 노마드는 발달된 디지털 기기와 통신수단을 바탕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된 현대인의 특징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어로 자리잡았다. 오늘은 파리의 에펠탑 아래에서, 다음 주엔 피렌체의 카페에서, 다음 달엔 발리의 해변에서 해지는 석양을 보며 노트북 안에 펼쳐진 인터넷 세상에서 일하는 삶. 사람들이 생각하는 머릿속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이런 낭만적인 상상들이 가득 펼쳐져있다.

그러나 이는 ‘디지털 노마드’라 칭해지는 사람들의 1%도 채 안 되는 사람들에 해당하리라 생각한다(당장 파리로, 피렌체로, 발리로 떠나는 비행기표를 턱턱 살 수 있을 정도라면 그것 만으로도 이미 상위 1%의 삶일테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디지털 노마드는 여행과 일이 하나되어 살아가는 삶을 꿈꾸는 현대인들의 욕망이 말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디지털 노마드를 유유자적하며 여행하는 삶으로 보기 보다는, 원격근무의 한 형태로 보는것이 더 올바를 것이며, 자크 아탈리가 말한 현대인의 특징적인 부분에서 접근하는것이 더 바람직한 방향일 테다.

아마 우리가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몽골의 유목민과 같은 삶을 2017년의 도시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것이다. 우리는 자그마한 방에서 1년 혹은 2년 동안 살다가 보증금과 월세의 인상, 혹은 계약 만료로 인한 재계약의 불발과 같은 이유 등으로 전세와 월세방을 전전하며 주기적으로 주거공간을 옮겨 다니고 이주를 강요당한다. 애초에 집을 가지겠다는 것 자체가 꿈이자 희망, 목표가 되어버린 곳에서 자기만의 집을 갖지 못한 자는 유목민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짐을 싸고 푸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곱씹게 되는 사람들.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 한국 뿐 아니라 지금 전 세계의 젊은이들은 유목민의 삶을 살고 있다.

이건 얼핏 보기엔 짧은 여행의 여정을 일상 위에 길게 늘어놓은 것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돌아올 곳 없이 삶의 터전을 통째로 옮겨 다닌다는 점에서, 이는 여행보다는 차라리 유목민의 삶에 가깝다. 이런 유목민적인 삶이 낭만적이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왜 젊은이들이 디지털 노마드와 같은 대안적 삶에 끌리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렴풋하게 상상하는 디지털 노마드가 언론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디지털 노마드 = 여행하는 삶’이라는 상상은 환상에 불과하다. 나는 어떻게 자크 아탈리가 말한 개념이 이런식으로 변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이런 대안적 삶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도 세상엔 존재할 테다. 부정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자크 아탈리가 말한 ‘부유한 계급’의 사람들만이 조금 더 좋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의 이주를 선택할 뿐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디지털 노마드 = 여행하는 삶’에 조금 더 가깝다. 대다수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은 월세에 밀리고, 계약에 밀려나 다른 곳으로의 강제 이주를 겪을 뿐이다. 이는 ‘여행하는 삶’보단 차라리 치열한 생존의 영역에 가깝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디지털이라는 개념에 다시 한번 발목잡힌다. 그들은 인터넷이 원활히 되는 대도시나, 디지털 인프라가 어느 정도 구축된 곳에서만 일할 수 있다. 일을 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원격근무가 가능한 직종의 기술을 갖고 있는, 그 중에서도 더 특출나게 뛰어난 사람들만이 일을 원활히 구할 수 있다. 이는 21세기에 나타난 또 다른 양상의 계급화다.

실제로 나는 얼마전 6월 6일 부터 21일까지 떠나는 여행계획을 두고 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원격근무와 인터넷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으며, 내가 떠남으로써 생기는 공백을 어떻게 메우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디지털 노마드의 삶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일루아는 기본적으로 리모트 근무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인터넷이 원활히 보급되지 않은 곳에서의 리모트 근무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건 리모트 근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허울 좋은 농땡이에 불과하다. 만약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다음 행선지를 고르는 많은 기준 중에 ‘인터넷 보급률’은 상위 3개 중의 하나에 포함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족쇄로 다가올 수 있다. 노동이 사람을 발목잡는 삶. 어쩐지 익숙한 현상이다. 노동이 사람의 행동 반경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이는 야근에 치여 저녁조차 내 마음대로 쓸 수 없어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는 직장인들의 삶과도 묘한 기시감을 일으킨다.

게다가 내가 속한 컨텐츠 팀은 그 특성상 직접 경험해보고, 현장에서 컨텐츠를 촬영 및 제작해야 한다는 여건을 갖고 있다. 컨텐츠를 멀리서 제작하겠다는 말은, VR(Virtual Reality)로 여자친구를 사귀겠다는 말 만큼이나 얼토당토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미리 사전에 촬영 및 취재를 해놓고 제작하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나는 디지털 노마드라는 삶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아, 물론 나는 팀원들의 동의 하에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는 곳은 ‘노마드’, ‘유목민’의 나라인 몽골이다. 몽골의 인터넷 사정이 좋았다면 고민의 깊이는 한층 얕았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행은 여행이고, 삶은 삶이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결국 끝없는 방랑일 뿐이다. 여행이 들불처럼 번져나가 유행이 되는 이 시점에 디지털 노마드라는 용어가 뜨거운 키워드로 떠오르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디지털 노마드란 엄밀히 말하자면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일 수 있는 여행과 노마드적 삶은 결코 같지 않다. 일과 삶을 둘 다 놓치기 싫어서, 혹은 노동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 등을 보며 택하기엔 디지털 노마드란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일 것이다. 노동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로움은 브루스 웨인 정도의 부자는 되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소설가 김훈이 말했듯, 밥벌이는 지겨운 일이자 진저리나는 삶의 영역이다. 모든 것에 ‘밥벌이’라는 생존의 영역이 들러붙는 순간, 그것은 쉽사리 자신을 낭만의 영역에 포함시키려 하지 않는다.

디지털 노마드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다시 한번 진지하게 본인이 무한한 방랑의 길 위를 걸을 용기와 자신, 결단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장소는 제한되었으나 사유는 무한히 뻗어 나가는 사람과, 전 세계를 매일 같이 이동하면서도 사유가 갇혀 있는 사람 중 누가 더 자유로운 사람이며 현대적 개념에서의 진정한 노마드일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우리는 이미 모두 그리 좋지 못한 방향에서의 노마드적 삶을 살고 있으며, 나는 우리 사회가 차라리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질 들뢰즈 (2004).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서울: 민음사

자크 아탈리(1999). 21세기 사전 – 자크 아탈리의 미래 읽기(편혜원 옮김). 서울: 중앙M&B

서동욱, 노마드-철학에서의 유목민적 사유, 네이버 캐스트, 2010.10.24

*해당 글에 들어간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회의를 망치는 사람

이번에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자, 회의를 망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해볼까 한다.

즉 회의를 망치는 사람이 나라는 소리다.

지난 팀원들과의 회의 말미쯤, 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회의에서 나는 팀원들의 의견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계속되는 회의에서의 내 필요성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좋지 않은데, 심지어 나는 저 생각을 말로 내뱉었다. 그리고 아차 싶었다.

그날 내가 왜 그랬던 걸까?

그날 시간 가량 진행된 회의에서의 내용은 주로 컨텐츠의 방향에 대한 것들이었다.

주제자체가 내가 개입할 여지가 적은 분야이기도 했지만,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르는 부분이 계속 나올 것이 분명했는데, 난 그날 회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듣기만 하고 있었을 뿐.

회의 : 여럿이 모여 의논하는 것.

회의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 ‘여럿이 모여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이 회의다. 즉 어떤 주제에 대해 여러 의견을 구하고, 각기 뻗어나간 여러 의견을 하나로 취합해 가는 과정이 회의다. 급진적인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단순히 듣기만 하는 사람은 회의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다. 사전적 정의대로라면, 회의에서 의견을 내지 않는 사람이 필요할까? 게다가 그 사람이 동료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듣고만 있다면, 그런 사람은 더더욱 필요 없을 것이다. 그건  말을 듣고 동문서답하는 시리보다도 못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왜 그날 회의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다른 팀원이 말하는 것을 그냥 듣고 있었다. 듣고, 생각해보고,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닌 그냥 듣기만 했다. 회의는 의견의 교환이지 일방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렇기에 다른 동료들도 내 의견을 듣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날 내 의견을 말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회의 때 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만들었다.

또한, 난 그 날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다른 팀원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부분에 관해서 물어봤을 때 직접 대답을 해주거나 아니면 내가 이해하기 쉽도록 다르게 설명해줄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질문을 하면 회의의 흐름을 끊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하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전형적인 질문 안 하는 한국인처럼 행동했다.

앞서 서술한 두 행동을 지금 와서 다시 생각을 해보니, 나는 그날 회의 시간에 주로 나오던 이야기와 좀 다른 방향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이야기를 꺼내면 왠지 쓸데없이 회의가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를 꺼내면 내가 귀찮아질 거 같으니까 스스로 내 의견을 억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러면 안 됐다. 사실상 직무유기나 다름없지 않나 싶다.

이쯤 되니 이러려고 회의에 참여했나 괴롭고 자괴감이 든다.

다만 반성문을 쓰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윗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특히 내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있다면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다른 의견을 냄으로써 일종의 논쟁(?)을 시작할 수 있고, 오가는 논쟁과 합의 과정에서 좀 더 견고한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긴 회의는 서로간의 의견을 조율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또한 의견을 내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내 분야에서도 내가 업무를 이끄는 것이 아닌 업무가 나를 끌고 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회의 때 동의된 사항을 바탕으로 업무의 진행 방향을 정한다. 하지만 회의 때 나온 모든 의견에 아무 이견 없이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이고, 업무 진행 방향에도 다른 의견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업무를 진행하다 보면 뭔가 아니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 회의에서 아무 의견도 제시하지 않다가 즉 어정쩡하지만 동의를 표했다가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 쉬울까? 아마 대다수는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냥 업무를 진행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에서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즉 업무가 나를 끌고 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의견을 가진 서로가 함께 말을 하고 치열하게 논의해야 한다.

특히 자신의 의도가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더 적극적으로 회의 때 자신의 의견을 말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이것은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